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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의 요람

2023-07-16

결국 인간은 그 의지로 살게 될 것이다.

장르: CoC

감독:

출연: 사라트 페르테나, 유리

매캐하고 소름돋는 냄새와,
모든 것을 씻어내릴 듯이 내리는 빗소리가 납니다.
무언가의 잔해 같은 쇳덩이들이 여기저기 발에 채입니다.
잿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빛도…
조금씩 비가 그치더니,
빗방울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집니다.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8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 장소는 현실이 아닌 꿈.
어느새 우뢰는 그치고,
하늘에선 빗방울 대신 재의 파편이 느릿하게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비가 그친 이후 바닥의 쇳덩이들이...
회색 빛의 식물들로 변했습니다.
당신이 걸을 때마다, 발 아래의 식물들은 재로 변해 공중에 흩날립니다.
저 멀리,
번개가 반복적으로 치는 게 보입니다.
유리:... (왜지? 이런 건 과거에 끝났던 것 같은데. 흐릿해진 기억을 끄집어낸다. 언제나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 속을 살아가는 사람이, 유일하게 흐릿한 두뇌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꿈 속 뿐이다. 그래서 꿈 속에서 영영 살아가려고 한 적도 있었고...)
문제가, 생겼나?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잠깐 이리 여유 부린들 어떤가.)
(어딘가로 정처없이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어 회색 빛의 식물을 만져본다.)
손을 뻗어 식물을 만지면…
손끝에 닿은 식물은 재로 화해 스러집니다.
잿가루가 날리는 방향,
번개가 내리치는 장소 중앙에
웬 작은 인영이 보입니다.
유리:(이곳이 어디더라, 기억은 수면 위로 부상하듯 천천히 다가온다. ...아. 천천히 이것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바짝 붙어 뒤따라온다. 그러니 작게 소망해본다. 깨어나거든, 꿈을 기억하지 말아라. 제발 마음 편히 좀 살자. 그런 부질 없는 소망을 한다.)
(인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작은 아이의 실루엣입니다.
당신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걸음을 옮겨도…
아이는 환각같이 딱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유리:?
아무리 걸어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유리:이리 와. 안 와?
오라는 아이 대신…
갑자기 천둥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하다 못해 제 자신이 존재하는지조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입니다.
유리:(깰 때가 됐나)
그 순간, 다시 번개가 칩니다.
번쩍, 온 주변이 빛나고...
아이와의 거리가 반으로 좁혀졌습니다.
유리:(왔나?) 말로 하면... 듣나?
번쩍, 짧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다시 번개가 칩니다.
다시 한번 엄청난 빛이 주변의 폐허를 밝힙니다.
아이와의 거리가 이제 더 가깝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습니다.
유리:이봐. (냅다 붙잡으려 손부터 뻗는다.)
빛이 사그라들자
어둠이 다시 모든 것을 삼킵니다.
짧은 간극 이후, 또다시 번개가 치고,
눈부신 빛이 모든 것을 밝힙니다.
실루엣이었던 아이의 뒷모습은 이제 바로 앞에 있습니다.
손을 뻗자 아이가 뒤를 돌아보고,
당신의 두 눈이…
아이의 은은히 반짝이는 두 눈동자와 마주칩니다.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유리:(기상)
[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27일 올해 들어 전 도시의 모든 지역에 폭우주의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오늘의 날짜는, 10년 전 천문학의 역사상 기록적인 조화파수렴이 관측된 지 정확히 2일 전의 날짜로...]
조금 열려있던 창문 틈새로 라디오 방송이 들립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6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음…
녹색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누군가가 문 앞에 있는 것 같네요.
유리:...아침부터 누구야? (인터폰을 확인해본다.)
아침부터 등장한 사람은,
당신의 인간관계 중 시간 관계 없이 찾아올 사람이 …
그리 많지는 않죠.
사라트입니다.
유리:...? (인상을 찌푸리고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 찌는 더위에 밖에 마냥 세워놓을 수는 없지만 갓 일어난 꼴을 보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문은 열어주고 자기는 씻으러 가는 이상한 결론이 나왔다.) 방에서 기다려. 준비하고 갈 테니까.
사라트:(노크도 안 했는데 문이 열렸다.) ?
응. (착실하게 말 )
(반만 듣는다.)
유리:(다 들으라고;)
문을 열자 사라트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네요.
전에 말하기를,
"남의 집에 방문할 때는 선물을 가져가야 한다고…"
그게 꽃다발만 가져가라는 뜻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꽃은 로벨리아.
좋은 향을 풍기는 보랏빛의 꽃입니다.
사라트는 알아서 기다리라고 하고…
씻으러 가면서
유리:
자연
기준치: 10/5/2
굴림: 35
판정결과: 실패
오늘은 보라색이네.
유리:(보라색이려니)
(평소 준비 시간 평균 2시간)
(온갖 케어 제품 챙겨바르고 헤어 세팅하고 옷에 장신구까지 어울리는 걸로 다 고를 즈음이면 사라트는 냉장고를 뒤져서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사라트:(기다리랬지만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은 안 했다. 자연스럽게 남의 방에 침입한다.)
평소 준비 시간 평균 2시간.
오늘은 몇 시간 걸릴까요?
KP:3 시간 후…
방으로 돌아오면 사라트가 창가에서 햇빛을 쬐고 있습니다.
창가의 꽃병에 꽂혀 있던 꽃은 로벨리아로 바뀌었네요.
원래 꽃병에 꽃혀 있던 꽃은 탈탈 털어 버린 모양입니다.
유리:(평소의 머리카락 한올까지 완벽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나왔다. 만족했다.) 기다리는 동안 내 집처럼 편안하게 알아서 지낸 듯해서 마음이 참 흡족해.
밥은?
유리:
심리학
기준치: 10/5/2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사라트:(미묘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어딘가가 이상합니다.
평소 느껴지는, 호의를 가진 사라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입니다.
유리:(똑같이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뭐.
사라트:내 계획을 망치고 이런 꼴로 지내고 있었군.
그리곤 순식간에 가운 안주머니에서 작은 스프레이를 꺼냅니다.
그가 스프레이를 당신의 얼굴에 뿌리자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떻게든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마비된 느낌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습니다.
흰 연기 너머로 사라트의 모습이 일렁입니다.
그의 살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
살 아래의 인간이 아닌 무엇이 드러납니다.
기이하게 일렁이는 '무언가'
저런 건 절대 인간이 아닙니다.
유리:(뭔가 기억에 있는 무언가인데)
SAN Roll
기준치: 67/33/13
굴림: 11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감소 -1
당신은 곧 정신을 잃습니다.
눈을 뜨자,
주변은 어둠입니다.
유리:아, 머리야... (별안간 친구의 모습으로 위장한 괴이한 생물에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것 치고는 태연하게 재기상했다. 주변을 손으로 짚어본다.)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으면,
사방이 벽인 아주 좁은 공간 같습니다.
천장도 막혀 있습니다.
유리:(누가 아무데나 쑤셔넣었어?) (황당)
(사지는 자유로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옷과 소지품은 멀쩡한지 확인해본다.)
KP:옷과 소지품은 멀쩡합니다.
그 순간,
해가 뜨며 어둠이 걷힙니다.
당신은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이루어진 좁은 물체에 갇혀 있으며,
어쩐지...
익숙한 물체네요.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투명한 정지의 입방체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라트와 산책… 비슷한 걸 했던
전 세계정부 건물 앞,
길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유리:(어이없네...)
(안에서 걷어차서 굴리면 굴러가나 하고 쾅쾅 차본다.)
쾅쾅 차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때,
물체 한쪽,
투명한 벽면에 붉은 색의 숫자가 떠오릅니다.
떠오른 숫자는, 315360000.
숫자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유리:(시간 내로 부숴보라는 건가?)
시간 내로 부숴보라는 건가?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옵니다.
정확한 형체는 알 수 없지만...
그 누군가는 길을 따라 점점,
당신이 있는 투명한 정지의 입방체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유리:(일단 발로 걷어차면서 바라본다.)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은,
… 거꾸로 걷고 있네요.
그 사실을 눈치챈 순간,
멀리서 걸어오던 사람이 갑자기 속도를 높여...
빠르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거꾸로 걸어 정지의 입방체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떠오른 숫자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유리:이건 또 뭐야?
(숫자가 떠오른 벽면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본다.)
다가오던 사람은 계속 뒤로 걸어
당신의 코 앞까지 다가오더니,
당신과 정지의 입방체를 마치 환상처럼 통과해 뒤로 지나갑니다.
숫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 다시 나와 뒤로 걷기 시작합니다.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건 또 뭐야?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네요.
유리:(온갖 미친 일들을 겪어봤지만 이건 또 새롭다.)
숫자는 계속,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듭니다.
당신은 이 시간의 흐름에 간섭할 수 없고,
정지의 입방체는 부서지지 않으며,
버튼조차 없습니다.
유리:그런데 왜 나만? (영 방법이 없어보이니 두드려보던 행동을 멈추고 팔짱끼고 지켜보기로 했다. 꿈 속 존재 비슷한 게 된 기억은 없는데.)
...
그 순간, 빠르게 줄어들던 숫자가 느려집니다.
정지의 입방체의 투명한 벽 너머로,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당신의 모습과...
그 옆에 선 사라트의 모습이 비칩니다.
3개월 전의 당신입니다.
다시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느려지고,
전 세계정부의 건물로 향하는 당신의 모습이 비칩니다.
모든 장면이,
뒤로 감아지고 있는 영화 필름처럼 지나갑니다.
유리:(아 이게 그건가 주마등)
해가 뜨고,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는
한 바퀴의 하루가 1초도 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뀝니다.
마치 공간을 이동하는 것처럼,
지어진 건물이 사라지고, 도시가 점점 옛날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시골 마을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이곳은 어디이고, 언제인지 감조차 오지 않습니다.
유리:(요즘 주마등은 되게 신기하네)
입방체가 조금씩,
익숙한 회색빛으로 불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숫자가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정지의 입방체에 남은 숫자는…
5,
4,
3,
2,
1.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방체의 문이 열립니다.
짧은 안내음이 나옵니다.
:2044년 8월 27일에 도착하였습니다.
유리:(왜요;)
흰 연기가 걷히면…
이곳은… 숲?
유리:... 이렇게 안 보내줘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10년 전 먹은 점심 메뉴를 대라고 해도 댈 수 있는 사람이다. 시간 여행 따위를 시켜주고 싶었으면 조용한 방에 눕혀놓고 기억만 되짚게 시켜도 가능하건만 이게 다 뭔지. 입방체를 나서 앞으로 걸어가본다.)
태초의 숲으로 돌아온 걸까요?
그렇다기엔, 2044년이라고 했는데.
높게 솟은 웅장한 나무들과...
여름답지 않은 시원한 공기가 고고하게 볼을 간질입니다.
나뭇잎과 풀줄기 사이로 갈래 갈래 찢겨진 찬 빛이 당신을 비추고,
주변을 아름답고 고요하게 빛냅니다.
들려오는 소리는 새가 낮게 지저귀는 소리, 풀벌레 소리, 한여름의 매미 소리, 어디선가 숨겨진 채 나긋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
아름다운 자연이 당신을 휘감습니다.
숲을 따라 조금 걷자 숲의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의 밀도가 점차 옅어지고, 길이 나타났네요.
멀리 보이는 숲 밖의 하늘이 조금 붉은 것으로 보아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즈음인 것 같습니다.
유리:목적이 있으니 보내긴 했을 텐데. (길을 따라 쭉 걷는다.)
정지의 입방체에서 나온 말이 진짜라는 가정 하에,
10년만 과거로 돌아왔을 뿐인데도
2054년의 빽빽한 고층 빌딩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습니다.
숲의 밖으로 나오자.
옆에는 커다랗고 짙은 남색의 호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상아색 흙이 깔린 공터가 숲과 연결되어 있네요.
저 멀리에는 적당한 크기의,
학교가 한 채 서 있습니다.
유리:(적당히 사람이 분간될 만큼만 학교로 다가가서 밖에서 바라본다.)
유리: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학교 운동장에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몇 명의 아이들이 뭉쳐 있습니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힐끔거리며 수군대고 있네요.
자신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등을 돌린 채로 책을 읽고 있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아이를 향해,
"괴짜?"
"이상해!"
…다분히 악의가 가득한 소음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소음을 귓등으로 듣고 있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책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유리:음. (드물게 아주 곤란한 얼굴이다. 학창시절 수군거림을 듣는 것이야 익숙하디 익숙한 일이지만, 이쪽은 사라트 페르테나와 달리 들리는 대로 찾아가서 쥐어패놓는 타입의 아이였다.)
(그게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든, 선생이든... ...그런데 지금은 성인에 직업 군인으로 살아온 세월까지 더해진 참이다. 쥐어패면 큰일난다.)
...음. (대박 곤란한 얼굴로 아이들을 향해 걸어간다.) 이봐.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순간, 시간이 멈춥니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마저 허공에 멈춰 있습니다.
웅성대던 아이들은 고개를 돌린 채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서 있습니다.
유리:그나마 통과하진 않네... (원리를 모르겠다. 시간에 관련된 것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 해봤자 헛수고인 탓인가. 한숨을 쉬었다.)
(굳은 아이들 머리를 한대씩 통통통 두드려본다.)
통통통.
그 순간,
당신의 발치 앞에
모래가 떨어지는 모양새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구멍이 생겨납니다.
구멍 위로 별빛을 닮은 반짝이는 글자들이 떠오릅니다.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런 건 그냥 문자로 알려주면 안 될까?
어느 순간 허공 위 알파벳 글자들이 재배치됩니다.
구멍 위로 떠오른 문구는 하나의 긴 아나그램이네요.
유리:여긴 또 어디야? (발로 구멍 주위를 툭툭 두드려보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정지된 비디오처럼 아무런 미동 없이 굳어버린 세계를 홀로 헤매고 다녀봤자 얻을 것은 없다. 눈에, 기억에 담아두는 정도의 효과는 있으려나.)
문구가 아나그램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구멍 아래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짧게 들립니다.
"제법이구나."
목소리는 어딘가 얇게 떨리는 노인의 목소리 같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구멍 주변이 넓게 무너집니다.
구멍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떨어진 곳을 바라봐도 빛 한 줄기도 없습니다.
구멍 아래로,
아래로 …
계속 떨어지던 당신의 주위가 한 순간에 바뀝니다.
여긴 …
가정집의 주방?
유리:밥?
(이제 밥 주려나 하는 생각이나)
밥?
그러고보니 오늘 식사를 못 했습니다.
분명 구멍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웬 가정집의 주방 안이네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특별한 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일반적인 주방 안에 있을 법한 물건들 뿐.
당신이 앉아 있는 작은 식사용 탁상,
싱크대 위에 걸려 있는 두 짝의 스트라이프 오븐 장갑,
따뜻한 열기를 내고 있는 오븐…
유리: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오븐 속에서 부풀고 있는 쿠키가 타닥이며 구워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은 누구누구만큼 소리가 잘 들리는 것 같아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유리:(누구누구)
당신의 뒤로...
오븐 장갑을 끼고 있는 한 할머니가 느릿하게 걸어들어오네요.
군데군데 하얗게 센 머리는 짧고 동그랗게 말려 있으며,
썩 크지 않은 키와 넉넉한 체형이 어딘지 푸근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눈 옆의 잔주름과 웃고 있는 입꼬리에 깊게 패인 주름이 살아온 나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유리:(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누구신지?
노인:(홀홀…) 들어온 건 자네다만? (오븐에서 갓 구운 쿠키를 꺼내어 접시에 담는다.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접시 하나 더 꺼내 쿠키 절반을 올렸다. 식사용 탁상 위에 올린다.)
유리:오라고 부른 건 그쪽이잖습니까? (어깨를 으쓱이고 쿠키를 하나 집어들었다.)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90
판정결과: 보통 성공
KP:당신은 할머니의 두 눈동자에 감도는 묘한 빛을 봅니다. 마치 북극 상공의 오로라와 같은 빛입니다.
노인:그래, 그랬지…. 먼 길을 왔어.
유리:먼 길이라. 설명이 조금, 어쩌면 많이 필요한 것 같은데, (쿠키 반으로 쪼개보며) 그 전에 하나 먹어도 됩니까? 아직 공복이라서요.
노인:(먹으라는 듯 손짓한다.) 정지의 입방체의 오작동…. 내가 과거에 누군가에게 선물했던 물건을 누군가가 훔쳐 악용한 것 같구나.
유리:(쿠키 반쪽 1 와삭에 해치우며) 무슨 의도로, ...라는 건 물어볼 필요 없을 것 같고.
그건 무슨 물건이죠? (2 와삭에 하나 해치우고 새 쿠키를 집어들었다.)
노인:시간을 멈추거나 돌리고, 때로는 가속시키는 물건이지. 수리해야 할 거야.. 암, 수리해야지.
유리:(그런 걸 누가 수리할 수 있는데요)
누군가 날 그 안에 넣고 돌려버렸다는 건데... (누구인지는 알고, 의도도 대충 알 것 같고, 그럼 중요한 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려면 수리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노인:(말없이 웃으며 긴 목걸이를 늘어뜨려 보다가 건넨다.)
유리:? (건네받고 살펴본다.)
목걸이의 끝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녹빛 수정이 걸려 있습니다.
막대 형태를 띈 녹빛 수정의 길이는 겨우 손가락 한 마디를 넘으며,
투박하게 깎인 모양입니다.
노파의 눈을 닮은 신비로운 빛이 수정 속에 감도네요.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KP:보너스 주사위 +1.
노인의 손은 분명 아까까진 비어있었는데
언제 목걸이가 생긴 걸까요?
목걸이를 살펴보고 있으면,
노파는 당신의 어깨를 슬쩍 밉니다.
분명 가볍게 건드린 것 같은데,
당신은 그대로 뒤로 넘어집니다.
마치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불가항력을 느끼며 바닥으로 느릿하게 떨어지는 당신의 귓가에…
노파의 짧고 온화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습니다.
유리:(웃어?)
바닥에 머리가 닿는 순간,
눈 앞의 광경이 바뀝니다.
한 아이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이의 두 눈은 금빛으로 빛나며,
주황색 머리카락이…
…?
유리:...?
사라트?
사라트:(?)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갑자기 쓰러져서 데려왔어요.
유리:이건 또 무슨 짓이지. (10년 전으로 날아오더니 10년 전 사람으로 만들어놨네. 한숨을 쉬었다.) 여긴 어디야?
사라트:우리 집.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원은 멀어서. 몸은 괜찮아요? 주변을 확인할 정신이 있는 걸 보아하니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손가락 두 개 펴서 눈앞에 내민다.) 이거 몇 개?
유리:괜찮아. 맘먹고 죽이려고 해도 안 죽는 몸이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 세 개?
사라트:……
(어깨 꾸욱 밀어 다시 눕힌다.)
두 개였어요. (농담 안 통하던 성격 그대로)
유리:음... 10년 후의 사라트는 이런 것 정도는 거짓인 줄 알아봤을 텐데 안 통하네. (하하)
두 개. 알아. 만나서 반갑긴 하다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서 바빠. 아직 그 학교 근처에 있으려나. (다시 스르륵 일어난다.)
아, 혹시 나 쓰러졌을 때 손에 쿠키 없었나?
사라트:10년 후의 나?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만 조금 기울이고 만다. 이번에는 밀지 않았다.) 없었어요.
유리:아깝다. 덜 먹었는데. (한참 잘 먹을 나이)
안에서 봐선 특별할 것 없는 가정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근한 나무 침대와 가벼운 여름 이불이
단정하게 당신의 위에 덮여 있네요.
침대 맡 여린 색 나무로 만들어진 선반에는...
각종 식물학과 천문학 서적들이 쌓인 채 즐비합니다.
바깥과 연결되어 방 한 면을 전부 채운,
한 뼘 정도 열린 유리 문을 통해 저택의 뒤뜰이 보입니다.
부서진 보석의 파편처럼 노을의 빛을 잔잔하게 비추어 보이는 인공 호수와,
적당한 길이로 단정하게 다듬어진 풀.
창 너머로 지고 있는 깊은 주홍빛의 노을이 방을 밝히며,
낮은 선율로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온 방을 나른하게 적십니다.
여닫이 문을 바라보고 있는 방의 면엔,
짙은 색 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사라트:배고파? (초면부터 당당하게 반말 하길래 같이 말을 놓기로 했다.) 덜 먹어서 쓰러졌어요? (반만 놓았다.)
(..독 쿠키?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린다.)
유리:다 놔라.
사라트:누구신데 다 놓으라 마라 명령이신지. (그럴까요?)
아차.
유리:누구 되시는데 네 얼굴로 존대를 듣고 있으려니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아서.
사라트:고의예요. (당당!) 이름이 뭐예.. 뭐야?
유리:(고민) (어린 사라트 얼굴 봄) (다시 고민)
비밀. (산뜻!)
사라트:?
(물끄러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범죄자?
유리:이 얼굴로 범죄자면 꽤 큰일이겠군.
굳이 따지자면 피해자야. 누군가 날 납치해서 멀리 버리고 가버렸는데,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거든.
물론 돌아가면 범죄자가 되긴 하겠지... (중얼...)
사라트:미아..
유리:유기니까 미아랑 다르지 않을까?
사라트:응.. (솔깃) 어디에서 왔는데요? 어른도 미아가 될 수 있어?
유리:그럼. 인신매매도 하는데 미아 정도는 얼마든지 되지. (참 좋은 거 가르치며)
길을 찾아갈 능력이 있으니 어떻게든 집에 갈 수 있겠지만,
일단 밥 좀 줄래? 아침부터 내내 공복이라.
사라트:어…. (아껴놨던 아몬드 초코바 내민다.)
그러고 있으면,
방에 누군가가 들어옵니다.
유리:(이런걸론 밥이 안 되는데...) (애 간식 보며 그런 생각이나...)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라트와 같은 약한 곱슬머리를 가졌으나,
그의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입니다.
숲을 닮은 짙은 녹안을 가지고 있으며,
시선은 어쩐지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깁니다.
그는 당신의 목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유리:(따라서 유심히 바라보다가 슥 고개를 돌렸다.) 그건 너 먹고, 빵이나 밥은 없나?
아트미스:사라트. 자리를 비워 줄래?
사라트:왜?
유리:(어릴 때부터 말을 안 들었군...)
사라트:싫어.
유리:(많이...)
아트미스:사라트.
사라트:… (힝.)
(한껏 뚱해진 얼굴로 여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유리:(토라졌네......)
아트미스:음…. 식사 대접은 조금 후에 할게요.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자연스레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가 뗀다.) 열은 없고. 성함이?
유리:...당신과는 처음 보는군. (결국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한다. 어쩐지 껄끄럽다. 죽은 사람이어서, 같은 이유같진 않고, 어떤 까닭에 드는 기분인지 뾰족하게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여기서 내가 누굴 봐도 초면이지만. (어깨를 으쓱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유리. 동생분께 여러모로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트미스:그렇겠죠. (잔잔히 웃음지었다.) 아트미스. 말은 편히 하세요. (목걸이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눈을 마주한다.) 선물을 받으셨군요?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답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라트가 앉아있던 나무 의자에 걸터앉는다.) 제 동생과 친하신가요?
유리:말은 그쪽도 안 놓길래, ... 아니??? (진심 200%) 당신 눈엔 이게 친해보입니까?
아트미스:네. 편하게 대하길래. (사라트가 나간 쪽을 힐끔.)
이곳까지 오신 걸 보면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나 봐요. (침대를 손끝으로 느릿하게 두어 번 두드리다 멈춘다.)
유리:사라트는 늘 저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종일관. (한숨 푹) 듣고 싶습니까? 원한다면야.
당신은 이게 뭔지 아는 모양이니, (목걸이 줄을 쥐었다.) 서로 하나씩 이야기하면 공평하겠는데.
아트미스:푸후..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더 커도 여전한 모양이지. 내 동생.) 아니요. 어차피 미래의 일은 제게 들리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는…
메뉴는 뭐가 좋아요?
유리:밥. 가능하면 고기.
아트미스:그래요. (일어선다.) 대신 ... 토라진 내 동생 좀 달래 줘요. (떠넘기고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문 밖으로 고개만 빼꼼) 아힐. (고개를 숙여 무언가 속삭이고 돌아서서 방 밖으로 나간다.)
유리:그건 당신 전문인데요. (미간 짚음.)
사라트:(여전히 꽁...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른들끼리 할 말이라는 게 뭐야?
(미간 짚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섰다.) 식사 준비하는 동안 저택 구경시켜주래요.
유리:차라리 내가 식사 준비 쪽을 맡고 싶은데... (약간 슬퍼짐.)
의외로 과보호가 심했네, 사라트.
사라트:안제는 손님한테 요리 안 맡겨.
과보호?
유리:손님보단...
(너를 포함한 타인에게 요리를 맡길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은은하게 웃었다.)
아냐.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반항적으로 굴지 마. 동생이 신원도 확인 안 되는 수상한 사람을 길에서 주워 왔으면 보통은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일 테니까.
(일어나서 약간 어정쩡하게 섰다. 제대로 서면 사라트가 너무 작아보이는 탓이다. 원래도 적당히 작은 체구 취급했는데 이건 너무 작군...)
사라트:아. (눈이 동그래졌다.) 이따 신원 미상 수상한 사람 주워왔다고 잔소리하겠다.
(올려다보다가 그만둔다. 커.) 서재랑, 뒤뜰이랑, ...(고민..) 정문? 세 곳쯤 돌아보면 안제가 부를 거야.
유리:그래. (어정쩡...) 서재를 봐도 될까. 제법 궁금해지는데.
신원은 나도 잃어버려서 어떻게 증명해 줄 수가 없네. 잔소리가 심하면 네 탓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탓이라고 팔아먹어.
사라트:이름도 안 알려줘, 신원도 없어. 있는 게 없네.. (손 내민다.)
유리:가진 거 없이 버려졌는데 그럼 어떡해? (뻔뻔)
(아몬드 초코바 다시 올려줌.)
사라트:?
(다시 받은 아몬드 초코바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손 잡아끈다.) 발목은 괜찮아?
유리:(끌려간다.) 괜찮을 것 같은데. 언제 부러지기라도 했나?
사라트:맘먹고 죽이려고 해도 안 죽는 몸이라는 말, 진짜구나.
학교 앞에서 방까지 어떻게 데려왔다고 생각해?
(말하면서 방문 열고 들어간다.)
유리:그 정도로 안 부러져, 괜찮아.
난 또 잡아당기다가 부러지는 소리라도 들었나 했네. (정말 멀쩡한 발목 한 번 돌려보고 따라 들어간다.)
둥그런 방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처럼 거대하고 웅장하지는 않으나,
적당한 양의 햇빛과 먼지가 나른하게 떠 다닙니다.
많은 책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으며,
여러 가지 언어가 섞인 책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당신의 눈높이에 꽂혀 있네요.
유리:(슥 뽑아본다.)
어디서 많이 본 <정글 나무 대백과>입니다.
유리:(어디서 많이 본 게...)
사라트:(발꿈치 들고 책 제목 확인했다.) 그건 사힐라가 선물해 줬어요.
유리:사힐라 페르테나 취향이 왜 이래?(;)
사라트:사힐라도 알아요?
특별한 책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런 저런 학문에 관련된 책이 많습니다.
비교적 높이 위치한 선반에는 주로 우주의 형상이 그려진 천문학 책이 꽂혀 있고,
사라트의 눈높이에 가까운 선반에는 손때가 탄 각종 식물 사전이 꽂혀 있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사라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동화책도 보이네요.
유리:네가 방금 말했잖아? (뻔뻔)
식물을 좋아하나? ...내 어머니도 식물 학자였는데. 옛날에는.
사라트:좋아해. 사람보다 나아요. 어머니가 식물 학자였어요?
그러면, (오빠는 빼고, 아저씨..도 빼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낯) .. 당신도 잘 알아요? 식물.
유리:(아저씨는 빼는구나)
사라트:(왠지 안제 오빠랑 세 살쯤 차이날 것 같아서.)
유리:난 안 배웠어. 내 어머니는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내가 더 잘 알게 되면 그가 조금 슬퍼할 것 같았거든.
대신 태초의 식물은 좀 아는데. 그려줄까?
사라트:더 잘 알게 되면 슬퍼해요? 응. (서재를 뒤적여 스케치북을 들고온다. 토라졌던 건 다 풀린 듯.)
그림 잘 그려요? (질문이 많다.)
유리:사람들은 보통 그렇던데? (스케치북을 받아들었다. 필기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며) 난 뭐든 빨리 배우고, 잘 하거든. 너무 빨라서 문제인 모양이야. 넌 어때?
사라트:다른 건 잘하는데, (색연필과 사인펜 들고 왔다.) 요리는 못 해요. 안제가 주방 들어가지 말랬어.
(필기구들을 내민다.) 달걀부침 만들다가 벽이랑 프라이팬을 조금 태웠을 뿐인데.
유리:그걸 보통 집에 불을 낼 뻔했다고 하지.
사라트:달걀 껍데기를 천장에 붙였어요. 로켓 기술자가 될 재능이 보인대요.
그래서.. 안제 무릎을 발로 찼어요. (종알종알)
유리:잘했어. 비꼬는 거니까 그럴 땐 한 대 걷어차 줘야 해.
(바닥에 대강 앉아서 꿈에서 보던 풍경을 그려나간다. 기억이 약간 흐릿해졌지만, 적당히 뭉개진 풍경 정도로 그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적은 몇 번 없지만 이런 것도 재능에 속하는 모양이다.)
자, 이게 아마 태초의 숲이다. 정확한 종은 모르겠네. 생김새는 기억하지만.
사라트:우와아.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 방긋 웃었다.) 진짜 같아. 고맙습니다.
종은 나중에 찾아볼게요. (코팅제까지 뿌려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방 밖을 기웃거린다.)
고기 굽는 냄새 나.
유리:고기? (여태까지중에 제일 생생한 눈동자)
아직 부르려면 멀었나? (생생)
사라트:으음.. 고기 좋아해요? (방문 열고 나간다.)
유리:당연하지. 하, 쌈장이랑 마늘 얹어서 상추에 싸먹으면 진짜 맛있는데... 삼겹살 정말 맛있는데...
사라트:밖인가? (유리 소매 끌고 뒤뜰로 종종)
유리:(끌려감)
저택의 뒤뜰.
부서진 보석의 파편처럼 노을의 빛을 잔잔하게 비추어 보이는 인공 호수와,
적당한 길이로 다정하게 다듬어진 풀들이 다리를 간질입니다.
작은 원통형 물레방아가 일정한 리듬에 맞춰 가끔 또각이는 소리를 내며,
낮은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적십니다.
사랑으로 가꾸어진 것 같은 예쁘고 희귀한 식물들이 자리합니다.
어두운 나무빛을 고급지게 띠는 저택의 한 면으로
담쟁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
한쪽에 바베큐 그릴이 있네요.
아래에 숯불도 보입니다.
유리:(신남)
아트미스:(안 불러도 잘 오네.)
유리:귀만 예민한 줄 알았더니 냄새도 잘 맡는 모양이지.
아트미스:이쪽은 돼지 오겹살, 이쪽은 닭, 이건 채소. 손 씻고 와.
유리:(말 잘 들음) 안내해라.
사라트:(다시 유리 손 끌고 손 씻으러 간다.)
아트미스:(그 틈에 상추 쌈장 마늘 감자 각종 향신료 준비해서 늘어놓았다.)
(갓 지은 밥까지.)
안내를 받아 손을 씻고 돌아오면..
바베큐 풀세트네요.
한쪽에는 호일에 싼 감자 고구마 옥수수도 보입니다. 굽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유리:혼자 이렇게 준비하긴 어려웠을 것 같은데. 부엌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사라트 본다.)
사라트:(도리도리)
아트미스:(그런 사람이 왜 필요하지?)
유리:오빠한테 잘해라. (진심 300%)
아트미스:(접시랑 식기까지 세팅했다.) 많이 드세요. (남으면 처리 못 해.)
유리:예. (전혀 할 필요 없는 걱정을)
아트미스:(조금 웃김..)
사라트:알아서 해요. (채소 야금야금..)
유리:(사라트 접시에 고기 덜어놓으며 자기 것도 산처럼 쌓아놓고 잘 먹는다. 덩치만큼 많이 먹는다.)
있잖아, 사라트.
사실 이렇게 된 건 네 책임도 조금쯤은 있어서, 양심 없이 밥이나 몇 끼 뜯어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아트미스:(고기를 구워놨더니 야채만 먹는 동생 한 번 보고, 동생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도 한 번 보고..)
편식은 안 돼, 아힐.
유리:네 형제한테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몰랐거든. (고기에 마늘이랑 쌈장도 얹어서 사라트 접시에 옮겨놓고)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남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사라트:(고기에 마늘에 쌈장까지 올라간 접시를 물끄러미 보다가 마늘은 살그머니 빼며.. 눈치 본다.) 보답?
안제는…
아트미스:잘 먹어주면 그게 보답이라고 하지.
사라트:라는데요.
유리:(빼둔 마늘 다시 원위치해두며)
사라트:(마늘 빠진 쌈 냠.)
유리:은원을 어설프게 남겨두는 건 찝찝해서. 다른 건?
아트미스:흠….
(귓속말이라도 해볼까 고민하다가 과하게 청각이 좋은 동생 물끄러미..)
사라트:? (다시 돌아온 마늘 노려본다.)
(저쪽으로 원위치했나? 그러면 됐어.)
유리:(빠진 줄 알고 냠 먹은 쌈 안에 원위치 되어있다.)
사라트:..마늘 맛.
아트미스:(웃김..)
유리:네가 마늘을 먹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편식을 하면 못 쓴다.
사라트:왜요?
아트미스:키 안 커.
사라트:거짓말.
유리:맞아. 이렇게 먹다간 너는 다 커도 이쯤밖에 못 올 거야. (사라트 키 언저리 손으로 표시한다. 사실 충분히 크다.)
아트미스:아힐. 손님은 발로 차면 안 돼.
사라트:오빠는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손으로 유리 옆구리 찔렀다.)
아트미스:사고뭉치..
유리:대충 알 것도 같고... (찔리는 와중에도 잘 먹고 있다.)
(대왕 쌈 하나 와아악 먹어치움) 동생이 의젓하게 커버리면, ...아쉽겠네요.
아트미스:글쎄요. 늦추고 싶어도... 아이는 언젠가 커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잘 먹는 모습 보고 빙그레 웃음지었다.) 역시 보답은 됐어요.
(사라트의) 친구잖아요? (최소 여섯 .. 일곱 살은 차이 날 상대에게 보답을 요구하는 건 조금 그렇기도 하고.)
사라트:(점점 먹는 속도 느려지는 중)
유리:참 껄끄러운 사람이네, 당신은. (친우 중에서도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세상에 물어뜯기라고 태어난 듯한 선인들. 욕망이 뚜렷하게 보이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대하기 힘들다.)
(와중에 점점 먹는 속도 느려지는 사라트 손에 시원한 음료 들려주고) 마시면 위장이 리셋된다.
사라트:우리 오빠 안 껄끄러운데요. (쪼끔 꽁해진 목소리, 음료는 받았다.)
아트미스:그런가요? 그런 말은 처음 듣네. (다른 고기도 잘 구운 다음 접시에 옮겨놓았다. 슬슬 불이 꺼져가는걸.)
유리:빚지는 건 안 싫어해. 난 미래에 어느 순간이든, 어느 것이 관련된 일이든 도울 힘이 있거든.
하지만 갚을 수 없는 인간은 껄끄러워. 빚이 감당 안 될 만큼 불어날 것 같아서. (눈을 휘어 웃었다.)
아트미스:(유리 접시에 고기 좀 더 쌓아준다. 가득가득.) 능력이 뛰어난가 봐요. (미래에는 내가 이곳에 없구나.) 음. 충분히 보답이 됐어요.
(음료도 리필.) 호의를 빚이라고 생각하고 사나요?
사라트:(음료 쪼끔 마시고..) 위장 리셋 안 됐어. (속았다.)
유리:차라리 장부에 달아놓는 빚은 괜찮은데, 마음에 진 빚이 가장 무서워서요. (사라트 접시에 채소로 둘둘 두른 고기 한점 더 올려놓으며) 다시 생각해봐. 이제 채소를 먹으면 리셋된 기분이 들 거야.
사라트:(의심하는 게 다 티나는 눈초리로 본다.)
유리:(모른 척 감자랑 고구마 굽기 시작함)
아트미스:누구랑은 정말 다르게 사네. (왜 잘 챙기지?) 동생 있어요?
사라트:(채소로 위장한 고기 쌈 합..) ….
(입에 담은 채로 보라색 머리 사람 본다.)
유리:(보라색 머리 한 사람 웃음.)
외동입니다. 그런데 모시고 사는 데 약간 익숙해서.
사라트:(우물..)(우물..우물........)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유리:어라, 실수로 들어갔나. (모르쇠 구운 감자랑 고구마 접시에 분배함)
사라트:(분배된 감자랑 고구마 다시 보라머리 사람 접시에 떠넘기고 일어난다.) 놀러 갈 거야. 안녕. (손 팔랑팔랑 흔들고 뒤뜰 옆쪽 정원으로 도도도)
아트미스:푸핫. (웃김)
유리:후식도 먹어야 키가 클 텐데... (근심에 찬 채로 구운 구황작물들 잘 먹어치움.)
아트미스:(멀찌감치 떨어진 걸 확인하고) 얼마나 크죠?
커서도 저만하면 안 되는데.
유리:아까 손으로 표시해준 만큼.
아트미스:(다 큰 동생이 본인보다 작아서 만족한 사람 얼굴)
유리:(이 사람 왜 만족하지 하는 사람 얼굴)
(빈 접시 빤... 보다가 고개 들었다.) 뒷정리 도움 필요합니까?
아트미스:설마요. 놀러 가세요. (사라트가 한 말 따라하며 옆쪽 가리킨다.)
유리:그럼 사양 않고. (쌓여있는 게 좀 많지만 정말 신경 안 쓰고 사라트가 도도도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아트미스:(뒷모습 보다가 뒷정리 시작한다.)
도도도 사라진 방향으로 가 보면..
사라트:(정문 앞. 문을 빠끔히 열고 바깥을 기웃댄다.)
유리:...뭐... 하는 거지? (보통 반대의 위치에서 이러지 않나? 의아하게 본다.)
사라트:쉬잇.
(다시 고개 돌렸다가 금세 허망해진 얼굴) ...
새. 날아갔어. (꽁)
유리:새는... 날아가지.
걸어가면 좀 곤란하지.
무거워 보이는 문입니다.
문 앞에는 작은 나무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사라트:걸어가면 왜 곤란해요? (잘 걷던데?)
유리:걸어가다가 교통사고가 잘 나.
그냥 밖에 나가서 잡아오면 되잖아?
사라트:(충격받은 어린이 표정)
유리:(작은 명패를 읽어본다.)
명패는 굉장히 정갈하며, 잘 다듬어진 것 같은 매끈한 표면이 어두운 나무빛을 띕니다.
글자는 음각에 금박 처리가 되어 있으며, 나무 결이 선명합니다.
[ Atmis A. P. : ASTROLOGIST ]
높게 솟은 나무들과 잘 가꾸어진 꽃나무들이 정문을 제외한 저택 주변을 둘러싸고 있네요.
해가 거의 져 갑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유리: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ASTROLOGIST? 고개를 기울였다.) 명패가 왜 이래?
사라트:(?) 엄마가 단 거라 몰라요.
(관심가져본 적도 없었고.)
유리:그렇구나? (같이 관심을 껐다.)
사라트:(정원에서 보라 꽃 한 송이 보고...) … (머리 보고, 꽃 보고, 머리카락 보고. 목 아프다 그만 볼래.)
왜 크지? (쓰러져 있을 때는 이것보다는 작아 보였는데.)
유리:네가 작은 게 아닐까?
이제 밥도 먹었고. (작은 사라트 빤히 보다가 고민한다.) 내가 어디 쓰러져 있었는지 기억해? 일반인은 반나절 정도면 다 잊어버리던가?
사라트:학교요? (밥도 잘 먹고 몸도 괜찮아 보이니까 데려가도) 아.
해 졌어. 못 나가요. (손 끌고 저택 쪽으로 간다.)
유리:하긴, 애는 이 시간에 나가면 안 되지. (그걸 납득했다.)
사라트:(끄덕끄덕)
?
유리:근데 보호자 없이 신원 미상의 사람하고 둘만 다녀도 안 된다.
사라트:애 아닌데요.
덜 자랐지만 애는 아니야. (중요하니까 두 번 강조)
유리:덜 자랐으면 애잖아.
사라트:신원 미상 나쁜 사람..
(들으라고 한숨 쉬고 마저 끌고 간다. 그래봤자 열세 살 힘이지만.)
유리:(끌려간다.)
끌려가줍니다..
사라트가 유리를 데려간 곳은..
거실이네요.
아트미스:(차 마시다가 고개 들고 반색) 사라트.
사라트:(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왜?
아트미스:잠시 자리 좀 비...
유리:야.
(방금 다 달래놨는데)
사라트:………. (단단히 토라진 표정으로 아트미스 다리를 팍 차고 나간다.)
아트미스:아야야.
(일어섰다) 핫초코 타 주면 풀려요. 절반쯤은.
유리:절반만이잖아.
아트미스:남은 절반은. (가만히 웃고..) 보여줄 게 있어서. (손짓하고 서재로 향한다.)
유리:이번엔 알아서 풀고. (한숨쉬고 뒤따라간다.)
당신을 서재로 안내한 아트미스는,
서재의 한 구석에서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서를 꺼냅니다.
당신을 앞에 세워둔 그는,
눈을 반짝이며 고서의 페이지를 뒤적거리다
어떤 수정이 그려진 페이지에서 멈춥니다.
당신의 목에 걸려있는 수정과 동일하게 생겼습니다.
유리:오.
아트미스:(수정이 그려진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을 돌려 내밉니다.) 글자는 안 보이죠?
유리:예, 안 보이는 책이 몇 권 있었는데... (받아들고 훑어본다.)
알 수 없는 언어입니다.
오래 살펴본다면 분석해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네요.
유리:
심리학
기준치: 10/5/2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아트미스의 표정이 복잡해 보입니다.
유리:이것도 마찬가지네요.
내가 모르는 언어도 있고, 재밌네... (잠깐 학구열 나올 뻔)
아트미스:(사라트, 특이한 친구를 사귀었구나.)
보이지 않는다면 설명은 나중에. (책을 덮는다.) 밤이 깊어가는데, 쉬세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착한… (본다.) 어른이지요.
유리:어른이지.
아트미스:아이는 아니니까. 당신이 일어난 방이 손님 방이에요. (방은 찾아갈 수 있겠지?)
유리:(뭐든 특출나다지만 가장 특출난 것이라면 암기력이라, 언어 익히기만큼 빠른 것이 또 없다. 덮은 책을 잠시 물끄럼 본다. 잘 시간만 투자해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 (다시 시선을 올려 아트미스의 얼굴을 본다.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죠.
아트미스:(아이 착하다. 서재 문 열어준다.)
유리:(서재를 나서 깨어난 방으로 돌아간다. 꽤나 여유를 부리고 있다. 너무 늦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다.)
아트미스:일렬로 서는 별들이 당신에게 힘을 줄 거예요. 무운을 빌어요. (등 뒤에서 들릴 듯 말 듯 중얼이고 서재 문을 닫는다.)
방으로 들어가면..
침대가 보입니다.
침대 맡의 책 세 권도 눈에 띄네요.
유리:(책을 한 권 뽑아 펼쳐본다.)
순서대로 아트미스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수첩】, 검은 색의 두꺼운【마야 문명 속의 천체들】 한 권, 그리고 소설【리지아】입니다.
유리:명패도 이상하더니... (수첩 먼저.)
◈ :한 손에 들어오는 깔끔한 갈색의 가죽 수첩입니다. 손때가 조금 탔지만 정갈하게 관리되었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첫 장을 제외하면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적혀있는 글 뿐입니다.
[ 밤하늘이 손님이 오시리라는 사실을 예견한다. 또한 식▒들▒ ▒합▒ 정▒. 친우는 요즘 따라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손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
[ 별들이 일렬로 서는 밤엔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뎌져 달빛에 신화의 힘이 스며든다. 이 힘을 담아둘 방법이 있었다면… ]
[ 29일에 조화파수렴이 일어날 징조가 보인다. 1987년 이후 57년의 간극. ]
유리:...
... ... ...그...
(사이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을 좀 해보고...)
사라트... 괜찮겠지... (낯빛이 무척 어두워짐...)
(너희의 그 형제가 사이비란 말은 한 적 없었잖아. 당연하다. 보통 말 안 한다. 심지어 미래에선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 유리의 마음이 무거워졌을 뿐이다...)
(검은 색 책을 꺼내 훑어본다.)
◈ :무척이나 오래 되어 보이는 책입니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색의 두꺼운 표지에 황금색의 천체 지도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네요. 이 두꺼운 천문학 서적엔 책갈피가 끼워져 있습니다.
책의 전문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지만, 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에는 당신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또박또박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네요.
[ 조화파수렴이란 우리 은하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일렬로 줄을 서게 되는 현상이다. 세레스와 명왕성, 또한 제 9행성을 포함하지 않으며… ]
아래에 다른 색의 펜으로 첨언이 쓰여 있습니다.
[행성들이 줄을 서는 밤엔 신화의 축복이 있다는데, 본 것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당황스럽네.…]
유리:환각 현상... (사이비가 자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자주 쓰는 수법이지... 이쪽도 당황스럽다.)
(소설을 꺼내 읽는다.)
유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피곤합니다..
잠이 몰려오네요.
베개가 유난히 폭신해 보입니다.
유리:(음. 쉴까.)
(기묘할 만큼 태평한 정신머리로 사이비의 저택으로 의심하고 있는 와중에도 태평하게 누웠다.)
사이비의 저택인가? 의심하면서도
유리는 태평하게 누웠습니다.
쉬고 나서 생각하자.
깜박,
깜박,
깜박, ..
잠깐의 간극 후 눈 앞이 환해집니다.
유리:(깜박...) 몇 시지...
유리: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몇 시인지는 모르겠네요.
다음과 같은 방송이 귀를 울립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세계정부 측에서는 소수정예의 팀으로 이루어진 각국의 가장 유망한 과학자들을 세계정부의 과학실로 초대했으며, 현재 인공 식물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
언젠가 들어 본 방송입니다.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11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시선 한 구석에 스크린이 보입니다.
스크린에는 어딘지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주욱 뜹니다.
실험실 가운을 입은 모습인 걸로 보아...
아무래도 아까 설명한 과학자들의 얼굴 같습니다.
빠르게 넘어가는 얼굴들의 사이에...
누군가의 얼굴이 얼핏 보인 것도 같습니다.
그 순간, 주위가 웅성입니다.
당신의 뒤에서 작은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익숙한 목소리,
사라트와 당신입니다.
유리:음? (뒤돌아봄)
이미 했던 대화. 이미 와 본 장소. 이미 겪은 일.
또 꿈이네요.
"너도 나올 땐 방독면 써라. 오늘 미세먼지 최악이다."
"...그래. 다시 나올 때는 방독면 쓰마."
과거의 대화들이 재생됩니다.
유리:(이상하다. 다른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에 없고,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꿈. 고개를 기울이고 잠자코 바라본다.)
조금 더 말을 이어가던 사라트가
당신에게 가운과 방독면을 꺼내 건네던 순간,
모든 것이 멈춥니다.
세계정부의 건물이 조금씩 잿빛으로 변하더니
모든 건물들이 느릿하게 재가 되어 마치 바람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하늘에서 나풀거리는 회색 눈이 조용하게 쌓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건 화산재를 닮았습니다.
차갑지 않은 회색 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바닥에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잿빛으로 무너지던 빌딩 건물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습니다.
방독면을 손에 든 꿈 속의 당신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바람에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흩날립니다.
유리:(아, 이거랑 비슷했...나? 어쩐지 익숙해졌다.)
콰광-
갑자기 천둥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하다 못해 제 자신이 존재하는지조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입니다.
그 순간, 번개가 칩니다.
번쩍, 온 주변이 빛납니다.
어쩐지 익숙합니다.
유리:... (꿈이 익숙해야 하는데 다른 게 익숙하다. 거기 입방체 갇힐 때 딱 이랬는데. 미간이 구겨졌다. 헤매듯 발걸음을 내딛어본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 사라트의 모습이 보였다가,
곧 번개의 불빛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입니다.
번쩍, 짧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다시 번개가 칩니다.
다시 한번 엄청난 빛이 주변의 폐허를 밝힙니다.
사라트는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습니다.
익숙해진 어둠이 다시 모든 것을 삼킵니다.
짧은 간극 이후, 마지막으로 번개가 치고,
눈부신 빛이 모든 것을 밝힙니다.
그저 미동 없던 사라트의 뒷모습은 이제 바로 앞에 있습니다.
순간, 그가 뒤를 돌아봅니다.
당신의 두 눈이 은은히 빛나는 두 눈동자와 마주칩니다.
사라트:어서 돌아와.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유리:(꾸깃.)
사람이 기껏 휴가를 즐기고 있잖아.
눈을 뜨자 축축하게 젖은 뒷목이 느껴집니다.
식은땀이네요.
평소의 아침들과 같은 시원한 바람보단...
어쩐지 더운 바람이 여닫이 문 너머로 불고 있습니다.
해가 조금 시들하게 뜬 것을 보니 늦게 일어난 것 같네요.
매미 소리가 들리며, 여름 바람이 정원의 풀을 흔듭니다.
사라트:(똑똑)
유리:... (막 깨어나서 땀에 젖은 꼴로 남 앞에 얼굴 보이기. 절대로 싫다.)
사라트:살아 있어요?
죽었나아..
발소리가 멀어집니다.
유리:(갔네. 일어나서 욕실로 향한다.)
방 옆에 붙어있던 작은 문을 열면 욕실입니다.
각종 세면도구와 수건과 기타 등등..
욕실 문 옆에는 갈아입을 옷도 보이네요.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리:(난감...)
(여름이니까 헐렁한 옷이면 어떻게든 되려니... 쓰는 제품이 없어서 3시간까지는 못 하고 2시간 선에서 끝냈다.)
옷이...
놀랍게도 대충.. 맞네요.
유리:(그래봤자 오늘도 머리카락 한올부터 발끝까지 말끔한 몰골로 나옴)
사라트. (방 문 이제야 열어줌)
사라트:(방 문 옆에 누워있다가 느릿느릿 일어난다.) 하도 안 나와서 죽은 줄..
(십년 전에도 비슷한 성격)
이렇게 많이 자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유리:납치당해서 그래. (태평)
사라트:납치당했는데 이렇게 태평한 사람도 처음 봤어요.
유리:이제 다시 바쁘게 살아야 하려나 봐. (슬 미소지었다.) 친구가 정신 들었으면 재깍 돌아오라고 연락을 해서.
누구 덕에 잘 요양하다 끌려나왔는데 잠깐을 못 참아주고...
사라트:가요? (미미하게 시무룩..)
유리:가야지. 여기서 살 순 없잖아.
사라트:(그건 맞는 말이지.)
아트미스:(뒤에서 스르륵..) 음.. 어려울걸요. 아직은.
고쳐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루 더 요양하고 가세요.
사라트:뭘 고쳐야 해?
아트미스:종일 잤잖아. 건강이 안 좋은 거야. (대강 둘러댄다.)
사라트:아파요? (빤..)
유리:건강을 고쳐야 했구나. (급조된 본인 설정 숙지하며)
언제. 저거... 아니다, 이거 어떻게 고쳐지는데.
아트미스:?
사라트:우와. 성의 없어.
유리:우와. 성의 없어.
아트미스:하루 더 쉬고 나면 알려줄게요.
사라트:(납치?)
아트미스:또 이상한 생각 하지.
사라트:강제 요양?
유리:강제 요양?
내가 어디 가서 잘 눕혀지는 사람이 아닌데.
아트미스:나도 어디 가서 신원 미상 성인을 동생 옆에 두는 사람은 아닌데.
(웃음..) 어쩌겠어요.
유리:친구인데 어쩌겠어. (사라트 슥 보고) 이쪽에서 연락할 수단이 없어서.곤란한데.
아트미스:음.. (내 일은 아니니 괜찮다.) 그것도, 어쩔 수 없죠. (어깨 으쓱)
사라트, 약 만드는 동안 방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 건?
사라트:안 궁금할 것 같은데.
(그렇죠?)
유리:어쩔 수 없대. 네가 참아. (사라트 보고 어깨 으쓱)
응, 별 관심 없어.
사라트:(들었지 안제? 라고 말하는 낯으로 아트미스 빠안..)
유리:차라리 여기 책들에 쓰여진 언어를 해독하고 있는 게 낫겠어. 본 적 없는 언어 체계여도 규칙성은 있을 테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아트미스:(어디서 저런 친구를 사귄 걸까..)
방에 있으면 책 가져다 줄게요. (어쩐지 달래는 투)
사라트:손님방?
아트미스:네 방.
사라트:(치.) 오빠가 원래 이렇게 내 말을 무시하지는 않는데 오늘은 이상해. (유리 본다. 잡고 갈 소매가 없다.)
유리:이상하다. 원래 저럴 것 같은데. (마주 본다. 손 줬다.)
사라트를 따라 어느 방으로 가면..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녹빛.
이건… 식물의 요람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벽을 타고 자란, 깔끔하게 다듬어진 담쟁이,
창가에 일렬로 세워진 처음 보는 난색 식물들의 화분,
책상 옆의 커다란 난초,
보라색부터 분홍색을 띠는 형형색색의 꽃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해 보이는 식물들,
천장에 붙어 있는 선풍기 날 위로 겹겹이 자란 아름다운 덩굴,
책상 위의 작고 여린 라일락 화분…
사라트:(라일락 화분을 가리킨다.) 피피예요.
유리: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사라트:덜 키운 건데요.
유리:다 키우면 여긴 네 방이 아니라 식물 방 아닐까?
사라트:오빠랑 똑같은 말을 하네. (능소화 덩굴 벽 옆에 섰다.)
(피피 화분도 들고..) ?
똑같아. (화분 번쩍 들어보인다.) 색.
유리:?
R -12 G +2 B +26 정도 차이 나는데.
(색에 엄격한 편)
사라트:그게 보여요?
유리:보통 보이지 않나? (번쩍 들어올린 라일락을 내려다본다. 꼬마가 키운다고 이렇게 키워지는 거였던가, 식물들이.) 식물은 왜 좋아한 거야? 세상에 아무런 관심 없었던 주제에.
사라트:(눈 커진다.) 어떻게 알았어요? 관심 없는 거.
유리:관심이 있으면...
나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안 묻지는 않지?
사라트:...
(비즈니스 미소 방긋)
유리:(맞비즈니스 미소 방긋)
사라트: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빙글 돌아 능소화 덩굴을 바라본다.)
닮아서?
유리:몰랐거든. 좋아하는 거. (어련히 필요한 일이라, 혹은 시키는 일이라 배웠겠거니. 어쩌다보니 세상을 구할 처지에 놓였겠거니. 그냥 그리 생각해서.) 뭐랑 뭐가?
사라트:나랑 이거. (덩굴 톡톡.)
사람이나 동물보다 조용하기도 하고. 식물은... 잠깐 안 보면 금세 쭉 자라 있어요. (유리에게 시선을 두다가 다시 덩굴 본다.) 가꾼다고 가꾸는 사람 마음대로 자라진 않는데, 그것까지도 좋았어요.
... 그리고 이건 나처럼 … 멀리 가고 싶어도 못 가니까. 조금, 닮아서. (작게 중얼거리다가 웃는다.)
유리:(왜 못 가냐고 물어봐야 할 시점 같은데, 그것보다는 역시 다른 게 궁금해진다. 언제나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친구였으니까. 진짜로 떠난 적도 있고.) 왜, 멀리 가고 싶은데.
사라트:으응.. 답답해서요? (숲이, 세상이, 자신이 속한 이 지구가 가끔 이유없이 답답해져서.) 그래도 이거 보고 있으면 괜찮아져요.
멀리 간다고 덜 답답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유리:가족은. (몸을 반쯤 접듯이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보고 있으면 괜찮았던 사람은 없었어?
사라트:안제는 좋아해요. 아템도요. 하지만 …. (골몰..)
부족해요. (짧은 답을 내어놓는다. 좋아하지만, 이 세상에서 숨을 쉬기에는 부족해서.)
유리:... (꽤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듯도, 우스운 듯도, 안타까운 듯도 한, 그러나 한 감정으로 정의하기엔 전부 지나치게 옅게 들어가 어정쩡한 얼굴이다.) 식물마저 없으면 그 때는 많이 부족할 것 같아?
사라트:(왜 그런 걸 묻지?) 성격 나빠…. (쭝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네.
유리:... (잠깐의 간극. 그리고는 그린 듯이 화사하게 웃었다.) 말을 했어야지 하여간 도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한 사라트 페르테나 진작 말했으면 내가 이유 하나 찾자고 28년치 기억을 하루 단위로 뒤져가며 그 고생을 했겠어? 피차 콱 망해버려라 싶던 세상 힘들여 구하기 싫어서 눈치보며 떠넘기던 거 알았으면 이런 배려라도 해주면 좀 좋아?
사라트:왜 나쁜 말 해요?!?
(도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한 사라트 페르테나라니.) ... (꽁한 낯)
유리:어른은 해도 된다. 그래서 어른이다.
아트미스:책 가져왔는데. (문 열자마자 사라트 표정 본다.)
(물끄러미.. 유리에게 시선을 준다. 뭐 했어?)
유리:뭐. 피차 콱 망해버려라 싶던 세상 힘들여 구하기 싫어서 눈치보며 떠넘기던 거 알았으면 이런 배려라도 해주면 좀 좋아? (반복재생해줌.)
아트미스: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생이 미래에서 뭘 했나 보다.)
하하. 책을 잘못 가져왔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들고있던 책을 슥, 숨긴다.) 별 떴어. 보러 가. (반대 손에 들고 있던 소풍 상자만 열린 문 앞에 들여놓고 간다.)
사라트:(꽁한 표정으로 소풍 상자 열어본다.) 샌드위치다. (오렌지 주스랑, 핫초코랑..)
(쪼끔 풀린 표정)
유리:(위에서 소풍 상자 내용물 같이 본다. 샌드위치다. 그리고 액상과당.) 역시 좋은 가족인데, 대뜸 부족하다고 하는 건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사라트:(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해?) 좋은 가족이에요.
나도 갈색 머리였으면 더 좋았을걸. (소풍 상자 들고 총총.. 가다가 뒤돌아본다. 따라오나?)
유리:(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휘적휘적 느린 걸음으로 뒤따라간다.) 난 한 명만 있어도 살 만 하던데, 욕심이 많은 동생이었네.
사라트:더 크면 괜찮아질까요?
앞서 간 사라트는...
벽과 같은 색으로 솟아 나온 작은 손잡이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자, 틈이 매우 작도록 벽에 완벽하게 꼭 맞아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문이 천천히 열립니다.
문은 성인 한 사람 정도가 딱 맞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네요.
어둠에 휩싸여 희미한 계단이 보입니다.
유리:(문이...) 작다.
사라트:(먼저 총총 올라간다.)
고개를 숙이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리:(잘 구겨져서 들어감..)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텅 빈 테라스를 닮은 넓은 옥상이 펼쳐집니다.
그새 해는 완전히 떨어졌으며, 광활한 하늘이 펼쳐집니다.
선선하고 어쩐지 심장을 뛰게 만드는 차가운 밤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흔듭니다.
옅은 색의 달이 떠 있습니다.
하늘은 도시에선 보기 힘든 별빛으로 수놓아져 있네요.
테라스 중앙에는 거대한 천체망원경이 보입니다.
사라트:(천체망원경 앞에 앉아 달걀 샌드위치를 꺼내어 베어문다.)
유리:(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큰 감흥은 들지 않았다. 자연의 신비에 경탄하는 성격도 아니고, 식물과 동물을 아끼는 성미도 아니었다. 그러면 사람이라도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뭐하는 성질머리인가 싶다.)
(최근 본 밤하늘의 기억과 별자리를 대조하면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 실용적이고 감성 없는 생각으로 하늘을 살폈다.)
망원경의 손잡이에는 A라는 이니셜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네요.
사라트는 렌즈에 눈을 맞추고 작은 조정기들과 겹겹의 렌즈들를 돌리며 망원경을 조정합니다.
사라트:(렌즈에서 눈을 떼고 라일락 닮은 사람을 검지손가락 끝으로 콕..)
봐요. (망원경 가리킨다.)
유리:이거 아트미스 페르테나 물건인가?
사라트:응.
유리:(사이비... 꺼림칙하게 망원경 본다.)
(의욕 없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눈을 가져다 댄다.)
망원경 속에서 두 별이 빛납니다.
다른 하나가 조금 더 작은, 두 겹의 식쌍성.
푸른 빛과 노란 빛으로 빛나는 두 별이 당신의 눈 앞에서 그 밝기를 영묘하게 변화시킵니다.
유리:(꺼림...칙....)
사라트:곧 색이 변할... 걸요? (확신 없는 어조였다.) 교양 프로그램에서 오늘이랬는데.
(아니면 말고.)
유리:오늘이 며칠인데?
조금 더 바라보자, 푸른 빛은 북극 오로라의 보라빛으로 빛나고,
노란 빛은 이글거리는 태양의 주황빛으로 느릿하게 변합니다.
사라트:8월 28일.
내일은 행성들이 한 줄로 선대요. (행성에는 관심 없지만 전해들었으니 하나 더 말해준다는 투.)
유리:29일에 조화파수렴이 일어날 징조가 보인다고 적혀 있던데. 자정 기준인가?
별들이 일렬로 서는 밤엔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뎌져 달빛에 신화의 힘이 스며든다. ... (사이비가 사이비스러운 의식을 행하는데 동생까지 거기 갖다놓은 상황인가 이거?)
사라트:그건 못 들었어. 안제는 알 걸요.
(무슨 말이지?) 동화책?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사이비 의식인가?
생각하고 있으면,
무언가 이상합니다.
양 손끝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유리:이것도 현상의 일부인가? (고개를 기울이고) 동화에 나오는 내용이야?
짙은 남색이 끝이 아니네요.
손 끝이 하늘의 광경을 닮았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섞여 잘 구별되지 않던,
밤하늘이 손 끝에 담겨 있습니다.
양 손 끝이 짙은 남색과 여러 오로라빛이 섞인 채 반투명합니다.
그 속에는 별을 닮은 반짝임이 신비감을 더하고 있네요.
이성 -1
사라트:뭐가요? 하늘?
마치 자신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저 우주와 하나가 되어 가는 것만 같은 감각이 손 끝을 잠식합니다.
유리:
지능
기준치: 95/47/19
굴림: 9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니, 이런 게. (손 들어봄.)
어쩐지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사라트:(벌레 앉았나? 빤히 본다.) ..없는데.
들어갈까요? (달걀 샌드위치 다 먹었다.)
유리:흐음. (생각보다 시간 제한이 짧은가? 보기에는 예뻐서 만족스럽게 흔들흔들 흔들어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착한 어린이 잘 시간이다.
옥상에서 내려오자 거실의 시계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을 가리키고 있네요.
사라트는 손님방 앞까지 당신을 배웅하더니, 문을 닫고 나갑니다.
침대 머리맡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습니다.
유리:(집어들어 펼쳐본다.)
◈ :[정해진 운명의 기묘함]
작은 수첩 두께의 책입니다. 책을 열자 첫 장의 빳빳한 종이에 작고 흐린 글자가 타자기의 흔적을 남기며 찍혀 있습니다.
[WYRD - 단어의 어원은 북유럽의 Urðr. 울드라고 읽으며,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노른의 세 여신 중 '운명'을 뜻하는 여신의 이름. 개인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신앙과 관련이 있다.]
책을 넘기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찍혀 있습니다.
잉크가 떨어진 타자기로 쓰인 듯, 글자들은 점점 옅어지더니...
결국 백지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네요.
유리:사이비가... 북유럽 신화를 차용하는 건 새롭군...
그때, 책의 빈 페이지들 사이에서 한 쪽지가 떨어집니다.
유리:(반사신경으로 잡아챘다. 뭐지? 펼쳐본다.)
[ 조화파수렴은 수정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는 별들이 나란히 서며 흐려지는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단순하던 공기에 마력을 흩뿌리며, 이 신화의 틈에서 새어나와 공기 중을 방황하는 마력들이 수정에 이끌려서 채워지는 형태로 작동하는 고대의 산물이다. ]
유리:(아, 그래서 등 떠밀어 보냈구나? 물어볼 땐 미소로 일관하다가 책과 쪽지로 대답하는 독특한 소통 방식이라니, 정말이지 새롭고...) 하하하... (기어코 소리내어 웃었다.)
왜, 말로 대답하면 정말 사이비라고 체포라도 할까 걱정되던가.
대답은 당연하게도..
들리지 않네요.
유리:여기저기서 재촉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웃음을 갈무리하고 쪽지를 다시 빈 페이지에 꽂아둔다. 사람이 달라졌다 할 정도로 느긋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알고 있다. 아주 찰나의 꿈이라 이리 유하게 굴 수 있는 것을.)
오늘도...
별로 한 건 없지만, 잠이 오네요.
어딘가에 잠이 오게 하는 식물이라도 있나 봅니다.
유리:(식물 잘못 쓰면 사람 죽인다는 걸 말을 했어야 했나 잠시 고민)
...
눈을 뜨자 식물질이 무성한 정글입니다.
거대한 나무들의 미로처럼 얽힌 잎사귀들 사이로 초록빛 햇빛이 들어와 당신을 영묘하게 비추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익숙한 곳.
익숙하게 발에 닿는 흙.
익숙한 어둠, 익숙한 빛.
긴 풀들이 다리를 간질이고, 저벅이는 흙의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법도 하지만...
정글은 바람이 불 때마다 풀들이 스치며 나는 싱그러운 소리를 제외하면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정글에는 그 어떠한 생물체도 없고, 사람도…
?
저 멀리 누군가가 서 있습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구별은 가지 않네요.
흰 가운이 눈에 띕니다.
유리:사람도... 사람이네.
(익숙한 곳이다. 느긋한 걸음을 옮겨 누군가를 향해 다가간다.) 야.
사람의 형상을 향해 아무리 걸어가도 어쩐지 좁혀지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지 않습니다.
형상을 향해 걸어갈수록 어쩐지 풀과 나무들이 자라나는 것만 같습니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완전히 빽빽해진 정글.
굵은 풀과 나무들이 당신을 막아섭니다.
...
그 순간, 익숙한 물이 발에 닿습니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물이 불어남과 동시에,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서서히 시들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은 계속 시들더니 점점 재가 되며, 호수의 물은 재가 된 나무들을 삼켜가며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유리:여긴 좀 가만히 있는 법이 없어.
물이 머리 위로 차오르자 고통이 당신을 덮칩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지 않습니다.
...
물이 차올라 감긴 눈 위에 따스한 빛이 닿습니다.
눈을 떠도 물은 눈을 아프게 하지 않으며, 어느새 모든 나무들은 사라져 있습니다.
물 속이지만 숨을 쉬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눈 앞으로 물 속에서 느긋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칼이 보이네요.
누군가 당신의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유리:(돌아본다.)
뒤를 돌아보자, 사라트의 두 눈과 마주칩니다.
그가 입을 열자, 입 안에서 공기방울이 위로 올라갑니다.
사라트:… 시간이 없어.
...
...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뜨자,
당신은...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습니다.
유리:군대에서도 이렇게는 안 일어났는데.
아트미스:(정원에서 물 주다가 큰 소리에 유리 문 쪽을 돌아보았다.) ... (봤다.)
아. (한가하게 손 흔들어준다.)
유리:으, 허리야... (시선이 느껴져서 슥 고개를 돌렸다. 혀를 차고 커튼 쳐버린다. 아직 준비 안 한 꼴이기 때문이다.)
아트미스:(눈앞에서 닫힌 커튼 보고 한참 소리내어 웃다가 저벅저벅 걸어온다.) (유리창 똑똑.)
유리:무슨 일? (얼굴 안 보인 채로는 대화 잘 한다.)
아트미스:그대로 있어도 괜찮겠어요?
유리:아니, 당신 동생만 속이 타고 있긴 해.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2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커튼을 치며 보면, 양 팔이 팔꿈치까지 투명해졌습니다.
몸의 경계선과 투명의 경계선이 흐려져가며, 투명한 팔 안에는 여전히 우주가 떠 있습니다.
아트미스:그렇겠죠. 문 열게요. 10… 초 후에. (당당한 통보)
유리:하아... (인상 찌풀.)
아트미스:(동의 구할 생각은 없었다. 드르륵, 문을 연다.)
유리:(머리만 탈탈 털어 정리하고 앉았다. 팔을 내려다보다가) 장갑 빌릴 수 있나? 꼴이 별로네.
아트미스:(유리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사라트와 비슷한 모양새로 고개를 기울인다.) 제게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신경이 쓰이나요?
유리:남의 눈이... 내 알 반가? (모순된 인간) 내가 입고 왔던 옷은?
아트미스:방문 앞에.
(방을 가로질러 반대편 문으로 향한다. 문 앞에 놓아두었던 옷을 내밀었다.) 지켜보니, 당신은 확실히… 내 동생에게 위협이 될 사람은 아니네요.
유리:? (내가? 라고 물어볼 뻔 했다가 참았다. 참는 법이 없는 성질머리를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위협이, 되었던가... ... (군인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총을 겨눌 뻔 하기도 하고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기분인데. 다만,) 그 애 기준으로는 그럴 지도.
(위협도 자신의 존재가 명확히 존재하기라도 해야 당할 수 있는 것이라. 정체성이 희미해진 지금은 뭘 위협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건, 없건, 당신 동생이 닳고 닳아 미래에는 기어코 무엇이 자신인지 알 수 없는 모래 한 줌만 남을 것이라고, 그마저 서서히 날아가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고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옷을 받아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수리는 됐나?
아트미스:(왜 저런 표정이지.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응시하다가 마주 웃고 말았다.) 절반쯤은. 그럼, 실례할게요.
아트미스는 작게 웃은 후, 당신의 머리 위에 제 손을 올립니다.
온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습니다.
아트미스:어려운 결정이었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는걸요. (장난스럽게 웃음지으며 눈을 맞춘다.)
아트미스의 눈을 바라보면,
짙던 녹안에서 어쩐지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아트미스의 등 뒤로 거대한 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솟아납니다.
익숙한 나무들.
이건…
그 곳에 있던 나무들과 똑같습니다.
그 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수리하라. 수리하라. 수리하라. 수리하라…"
처음 들어보는,
알 수 없는 목소리.
유리, CoC 시나리오 [녹의 요람] 독자적 주문을 습득합니다.
그가 유리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내자…
환각들이 재처럼 사라집니다.
아트미스:제대로 들어간 건가…. 전달은 처음이라서.
유리: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전달 받아보기가 처음이라서.
감사를 표하지. 존재가 사라질 처지의 이방인을 저울질하는 성질머리는 어떨까 싶지만, 뭐, 그 애 형제인데 오죽하겠어.
어려운 결정에 보답은 못 해주겠어. 당신 동생에게 갚겠다고 하고 싶어도... 이미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라.
아트미스:그 애들 앞에서는 드러내 놓고 저울질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자란 거야?) 음…. 성질머리는 유감입니다?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시간을 건너온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아직은 쓸 수 없겠지만.. 때가 올 거예요.
(유리 문 밖을 가리킨다.)
보답은 필요 없어요.
밖을 보면, 방금 전까지 밝았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유리:(많이 잤군. 뿌듯하다.)
꽤나... (컨셉에 충실하네. 라고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때가 빨리 오긴 할 모양이다.)
당신, 그냥 드러내 놓고 사는 게 낫겠어. 어차피 티나니까.
...아닌가? 어머니 탓에 익숙해서 눈치챘던가? 그 사람만한 성질머리가 또 없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학교에서 싸움박질 좀 했다고 다 죽여버리겠다며 냅다 총을 꺼내들고 학교로 가기 전까진...
아트미스:?
유리:17대 1로 싸웠을 뿐인데 집단 구타로 오해하신 모양이지.
아트미스:17대 1이면 보통은 집단 구타라고 생각하겠죠. (사라트가 성질이 심상치 않은 친구를 사귀었네.)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채던데, 당신은.. 그래요. 익숙했나 보죠?
유리:익숙한데... (페르테나들 성격 떠올려보고) 그래도 내 어머니가 낫군. (조용히 팔 안쪽으로 굽힘.)
사라트는?
아트미스:밖에. 응접실 소파에 널려 있을 걸요. (그 자세를 설명할 말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심심하다고.
유리:(널려...)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쿠당탕탕!
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트미스:... 오.
말하자마자. (방문 열고 나간다.)
KP:유리는 방에 남아있나요?
유리:(떨어졌어도 아트미스가 알아서 주워서 다시 널어놓겠거니 하고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준비 시간 단축하고 단축해서 1 시간 소요.)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방금 백화점 밖으로 걸어나온 마네킹마냥 말끔한 꼴로 방 밖으로 나왔다.)
방 밖으로 나오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순간 당신을 덮칩니다.
그렇지만 주변은 변하지 않았네요.
주변이 변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변한 걸까요?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 우주가 어깨까지 잠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마저, 무릎까지 우주가 차올라 있네요.
그와 동시에, 목에 걸려있는 수정에서 빛이 납니다.
사라트:(무릎에 밴드 붙이고 총총) 하루만에 나왔어요. (오늘도 말끔한 상대를 올려다본다.) 많이 아파요?
(아픈 얼굴이 아닌데??)
유리:(무릎 빤...) 아까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너였어?
아플 사람은 이쪽인 것 같은데?
사라트: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
….
(환자는 때리면 안 돼..)
유리:(옳지.)
사라트:난 안 아파. (손 잡아끈다.) 다 나았으면 따라와요.
유리:자라나는 호박은 상처나면 안 돼. 속이 썩어. 조심해서 살아라. (끌려간다.)
사라트:(헛소리는 무시해야겠다.) 별들이 한 줄로 서기 시작했어. 안제가 오늘은 밤에 나가도 된대요.
사라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신의 목에 걸려 있던 녹빛 수정이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수정은 행성의 배열에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유리:그래... 정말 떠날 때가 되긴 한 모양이야.
편하고 좋았는데. (본심.)
사라트:응?
아트미스:사라트. 손님을 숲까지 안내해 줘.
사라트:왜 숲이야?
아트미스:가면 알게 될 거야.
사라트:한 번에 말해주질 않는다니까. (먼데..) ... (올려다본다.) 숲에서 왔어요?
유리:아. (원산지를 따지고 보면 도심 한가운데 병원인 것 같긴 한데.) 응.
사라트:(납치당해서.. 숲에 버려지고… ……)
알겠어. (손 붙잡고 저택 정문으로 달려간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유리:이거 데려가서 키우면 안 되나.
있는 것보다 더 귀여운데.
사라트:(숲으로 뛰어가다가) 응?
… (두리번) 이거?
(귀여운 거.. 없는데? 나무 뿐이다. 항의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없는데.
유리:다람쥐가 있었다. 네가 못 봤지. (모르쇠)
사라트:(미미하게 시무룩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기준치: 15/7/3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엇. (찰푸닥. 한눈팔다가 넘어졌다.)
유리:
기준치: 5/2/1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엇. (못 잡았다.)
사라트:(무릎 탈탈 털고 일어선다.)
유리:(옳지.)
사라트:(무릎은 무사한가? 무사하다 1 아니다 2 1 )
안 다쳤다. (조금 꼬질해졌지만.)
유리:(조금 꼬질해졌지만.)
사라트:(금세 기분 좋아진 얼굴로 다시 걷는다.) 숲에서부터는 길 찾아갈 수 있어요?
유리:(숲을 돌아본다. 기억... 음. 난다.) 응.
조금 더 걷자 남색 호수가 보입니다.
상아색 흙이 만연한 공터가 숲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적당한 크기의... 따스하고 고요해 보이는 밤의 학교가 고고하게 서 있네요.
호수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숲의 시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의 밀도가 점차 짙어지고, 길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해가 빠른 속도로 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집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수정은 점점 더 맹렬한 빛을 냅니다.
사라트:(걷다가 정지.) 여기보다 깊은 곳으로 가면 ...
(심각한 얼굴) 곰 나와요.
유리:그렇구나. (그렇구나.)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다.
날이 어두운데, 넌 그만 돌아가.
사라트:응? 곰이다. (하늘을 가리킨다.)
유리:나왔어? (하늘 본다.)
위를 바라보자 둥그런 하늘이 보입니다.
명당이라는 건지, 이 곳만 나무의 밀도가 조금 옅어요.
둥그런 공터 같지만, 사방을 나무들과 이끼 낀 돌들이 가리고 있습니다.
방향을 알 수 없을 정도네요.
하늘은 총 일곱 개의 빛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습니다.
수정이 깨질 듯 빛납니다.
사라트:(히 웃었다.) 전부 행성이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너무 작아지는 기분이 들고….
사라트가 중얼댑니다.
여전히 내리는 비가 당신과 사라트의 머리와 주변의 풀을 적십니다.
유리: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래서 사람들이 작아질 정도로 멀리 떠나고 싶어?
사라트:우주로요?
당신의 상반신이 전부 우주를 담고 있어요.
하늘과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본 채로 한쪽 팔을 들어도,
어디가 팔이 끝나는 곳이고 하늘이 시작하는 곳인지 구별이 가지 않네요.
유리:우주나, 아주 먼 곳이나. (그러니까, 시간을 돌려서 돌아갔던 태초와 같이-) 사람이 없는 곳까지.
사라트:아니요.
그렇게 멀리 가면 안제랑 아템이랑, 헤어지잖아요.
없어지면… 무서울 것 같아요.
유리:그런 이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사라트:그런 이유 말고..?
(고개 갸웃) 무슨 뜻이에요? (이곳에 남을 다른 이유?)
유리:멀리 떠나버리지 않을 이유. 네 가족 말고는 널 세상에 붙잡아두는 게 아무 것도 없었냐고.
(세상은, 한 번 구했으니 할 만큼 한 것 같고. 그대로 사라지길 염원하던 삶이 약간 연명되었을 뿐이라 지금 사라진다고 해도, 아쉽지 않다. 그러니 존재의 경계를 잃고 우주로 흩어지고 있다고 해도 평온할 따름이다.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연명만 하느니 사라지기 전에 답을 들으면 더 후련하지 않을까.)
사라트:응.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식물은 내가 없어도 자라고, 다른 것들은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 않아요.
가족 말고…
(안제와 아템이 사라지면.. 글쎄. 세상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곳인데. 멀리 떠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겠지.) …… 왜 그런 걸 물어요?
유리:(하늘을 향해 들어올린 손을 쭉 펼친다. 음, 이래서 가려두고 싶었는데, ...)
(사라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평소처럼 껍데기를 씌워 가려놓아야 외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고민하고 있거든.
너와 달리 형제도, 가족도, 식물이고 나발이고 흥미도 없는 내가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뭔가, 하고.
사라트:응.. 안제는 나중에 내가 무언가를 더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좋아질 수도 있을 거랬지만… 아직은 모르겠어요.
(올려다본다.)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떠나도 괜찮지 않아요? 책임감으로만 남아있지는 말랬거든요. 오빠가.
책임감으로만 버티면… (뭐라고 했었지?) …나중에, 아플 거랬어요.
그렇지만 난. (시선을 하늘에 두고)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어도 조금 더 머무를 거예요.
유리:왜?
사라트:바로 떠나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유리:이런. (낮게 웃었다.) 이유가 없을 때, 네가 충분히 지치고 아프지 않길 빌어야겠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너는 앞으로 가진 게 없을 때도 잃어야만 할 거고, 세상에 대해 더 실망할 구석이 없다고 믿을 때마저도 새롭게 실망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칠 만큼 지치고, 떠날 이유가 될 만큼 수차례 고통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걸 안타깝게 여겨야 할까, 나는.)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떠나도 괜찮지. 일리 있는 말이야. 책임감으로만 버티기엔 지쳤고... 의무는 다했거든.
너한테만 물어보면 꽤 불공평한 처사가 될 테니까, 돌아가서 물어봐야겠다. (과거와 미래의 사라트를 구분해서 대한 적은 없지만, 친구로 지낸 경험이 있는 쪽에게도 답할 기회를 주는 게 공평하다. 감정도 삶의 이유도 닳아버린 쪽이라고 해도, 글쎄, 억울할 수도 있지 않나. 오라고 불러도 안 온 이유가 과거의 네가 떠나도 된단다, 였다고 하면.)
일곱 개의 빛이 점차 모이기 시작합니다.
순간, 하늘의 먹구름 속에서 초록빛이 잠시 은은하게 반짝였다 사라지더니,
한 줄기의 빛이 그대로 내려와 수정에 쬐어집니다.
놀란 아이를 뒤로 하고,
수정이 순간 맹렬하게 빛을 냈다가 폭발하듯 깨집니다.
그렇지만 조각이 떨어지거나, 어딘가로 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초신성을 닮은 빛을 내며 폭발하곤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사라트:돌아가서, 응?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어?
빛 너머로 놀란 말소리가 들립니다.
초신성의 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이곤, 반쪽 우주가 된 당신을 휘감습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마력 +50
비가 세상을 씻어내릴 것처럼 내리며, 온 숲을 적십니다.
비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네요.
차가운 빗물이 상쾌합니다.
지금이라면, 아트미스가 가르쳐 준 것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놀란 사라트가 당신을 여기저기 살피지만,
투명해지고 있다는 건 아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리:괜찮으니까, (살짝 찌푸렸던 표정을 풀었다. 손을 휘적거리고) 이제 돌아가. 사라트 페르테나.
사라트:응… 해도 졌으니까.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 말고) …저게 뭐지?
아이가 숲 공터의 경계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어쩐지 익숙한 물체가 덩굴과 이끼 낀 돌, 나무들 사이로 보이네요.
유리:옆길로 새지 말고...
사라트:(옆길로 총총..)
커다란 회색 물체가 이끼와 덩굴들 사이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리:(옆으로 새는 사라트 붙잡으러 성큼성큼 걸어옴..) 이게 왜 여기까지 왔지...
정지의 입방체.
사라트:이게 뭐예요? (이리저리 살피다가 왠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본다.)
유리:음. (고민.)
망태기.
사라트:망태기?
유리:꼴보기 싫은 사람을 넣어서 날려버리는 거야.
<별의 가호> 주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라트:꼴보기 싫은… (표현을 배웠다.)
(꼴보기 싫은 사람.) .. (빠안)
이거 타고 왔어요?
유리:잡혀온 거라 타고 왔다고 표현하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
(이거 집까지 안 가고 계속 옆길로 새면 어쩌지... 고민에 빠짐.)
사라트:그러면, .. 저 망태기(?)를 타면 다시 집에 갈 수 있어요?
유리:응. 왜? 관심 있어? 체험하게 해줘?
사라트:……….
오빠한테 말하고 와도 돼요?
유리:당연히 보호자 허락 받고 와야 한다.
사라트:먼저 갔다가 나중에 허락받으면?
유리:되겠냐?
사라트:… 네에. 돼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안 들키면..? (말해놓고 고민..)
유리:...안 들키면... 되긴 하지? (고민...)
사라트:(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들었다.) [놀러 갔다 올게.] (쪽지를 적어 나무에 꽁꽁 묶는다.) 다 했어요. (당당!)
유리:들키잖냐
완전범죄를 해낼 자신이 없다면 시도도 하지 말 것.
사라트:어..
… (고민…)
유리:그리고 네 작은 머리로 계획을 세워봤자 네 형제에게는 안 통할 테니까 꿈도 꾸지 마라. (양 어깨 잡고 쭉 밀었다.)
사라트:이잉. (쭉 밀려났다.)
유리:집에 가.
사라트:(주섬주섬. 쪽지를 다시 풀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볼 수 있어요?
유리:당연한 거 아냐?
영영 못 만날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떠나지 않는다면 어차피 만나야 할 걸.
그러니까 옆길로 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서, 멀리 떠나버리지 않을 이유 잘 붙잡고 살아 있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찾아갈 테니.
사라트:응. (머뭇거리며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서서 한 손 팔랑팔랑 흔든다.) 인사.
잘 가요.
(다시 돌아서서 길 쪽으로 뛰어간다.)
유리:(뛰어가는 사라트를 쭉 지켜보았다. 제대로 길을 따라 사라지는지... 또 옆으로 새지는 않을지... 제법 작은 움직임으로 변할 무렵이 되어서야 회색 입방체를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별인사는 안 한다. 새삼스럽게 뭘.
(별의 가호 주문을 사용한다.)
주문을 사용하려고 마음을 먹자,
갑자기 입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이 나옵니다.
이성-1.
주문을 사용하자, 당신에게서 흰 빛이 나오더니…
정지의 입방체로 빨려들어 갑니다.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물체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열립니다.
안은 텅 비었으며, 사람 두 사람 정도가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네요.
수리도 마쳤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리:(한숨 푹 쉬고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주말이 끝나고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는 직장인 같다.)
입방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닫히고 물체가 투명해집니다.
투명한 벽 위로 빗물이 흐릅니다.
물체의 벽면에 숫자가 떠오릅니다.
유리:출근길이 조금... 멀군.
순간, 숫자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커다란 나무들이 점차 시들어갑니다.
숫자가 더욱 빠르게 줄어들며, 세상은 당신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광합성을 멈추고, 사라졌던 나무들…
남색 호수에는 흙이 채워지고 도시가 세워지며,
커다란 건물들이 당신의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합니다.
철근이 점점 콘크리트로 덮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숫자는 이제 여섯 자리도 남지 않았습니다.
세계정부 건물이 세워지는 모습도 보이고,
이제 거리는 당신에게 완전히 익숙한 모습입니다.
그때, 정지의 입방체의 벽이 불투명해집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당신이 묵었던 병동.
자신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라트가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화면이 다시 빨라지더니, 사라트가 당신을 데리고 병동 밖으로 나가는 화면이 재생됩니다.
건네주는 라일락이 낮익네요.
화면이 다시 빨라지더니, 이번에는 처음으로 세계정부의 건물 앞에 섰을 때가 보입니다.
"사라트… …페르테나."
"뒤는 동료 과학자입니다. 실험 중이라 방독면을 벗을 수 없습니다."
다시 화면이 빨라지더니, 당신이 방아쇠를 당기던 화면이 재생됩니다.
정지의 입방체가 천천히 투명해집니다.
숫자가 떠오르네요.
5
4
3
2
1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방체의 문이 열립니다.
짧은 안내음이 나옵니다.
녹의 요람
END. 0
다시 미래로
유리, 크툴루 신화 +5. [생환]
유리:사라트 페르테나.
이거 물어보러 좀 멀리서 왔으니까 신중하게 고민하고 대답해 봐.
항상 멀리 떠나고 싶었던 주제에, 더이상 떠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도 어째서 떠나지 않았어?
사라트:… 돌아오자마자 하는 질문이 그거니.
유리:사소한 예의가 생략되긴 했지만, 이쪽은 10년만에 다시 보는 거니까 봐주고.
사라트: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단 건 또 어떻게 알고. (짧게 침묵하다가 입을 연다.) 전부 두고 가려 했었지. 인류나, 세계나…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으니까.
떠나도 상관없었을 텐데, 굳이 살려내고, 끌어내고, 지켜보겠다고 움직인 건. (가만히 마주보다가 시선을 비스듬히 옮긴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숨이 돌까, 궁금해서.
(그럴듯한 이유 하나를 내어두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선을 가늠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상대가 살아갈 세상이 유지되도록 한 번은 노력해봐야 했다거나, 다시 못 볼 사람이 남긴 유지를 따라야 했다던가. 답하지 않을 말이 머릿속에서만 맴돈다. 차갑고 지겨워서 머무르고 싶지 않은 세계, 무엇을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세상에서 돌려놓아야 했던 숨은 내 숨이 아니라, …)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아주 똑똑하지는 않았나 봐, 너.
유리:까부는 건 허락을 안 했는데, 조그만 사라트 페르테나. (잠깐 웃고는) 조금 더 그럴듯한 이유를 하나쯤 붙잡아두길 빌었는데, 늘 그렇듯이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야.
그래서 결과는? 숨은 돌던가?
사라트:(어릴 때와 비슷한 낯으로 물끄러미 보다가,) 그래 보이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약속은 지켰어.
유리:그래. 약속은 지켰군.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이미 만난 미래에서 한 약속이니 반칙인가 싶다가도, 원래 자신은 대체로 이런 삶을 살았으니 봐주겠거니 한다.) 사라트, 난 네 가족도 숨구멍도 될 수 없어. 의무나 책임이 될 생각도 없고.
사라트:(이제 와서 새삼스레 말하네.) 요구할 생각도 없어. (누구라도 내 숨구멍이 될 수는 없을걸. 언제라도 변덕스레 떠날 수 있는데, 의무나 책임을 가진 상대라 할 수도 없겠고.)
(질문을 들었으니 조금 더 말해줘야 할까.) 네가 날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겠다만, 내가 꼭… 떠나지 않을 이유가 있어야만 머무르는 사람은 아니라서.
항상 멀리 떠나고 싶어했던 건 사라트 페르테나지.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내가 다르단 걸 모를 네가 아닌데.)
유리:그러니까, 너는 살려냈고, 나는 살았고, 할 만큼 했으니까.
더는 미련이든, 책임감이든, 무엇이든 남겨둘 필요 없다는 뜻이야. (아트미스에겐 참으로- 면목 없게도. 당신 기일에 술 한 잔 사는걸로 갚았다 칠까.)
이제 식물은 나 없이도 자라니까. 그렇지 않나.
사라트:필요가 아니라 거부잖니. 그래. 이제 식물은 너 없이도 자라고, 내가 없어도 자라겠지. (겨우 익숙해지려던 세상은.. 다시 깨지게 될까. 뒤이어질 말을 예감하면서도 유리의 판단을 긍정했다. 놓는 건 익숙하며, 반복해 잡기에는 지친 지 오래고, 그럴 듯한 이유도 찾아내지 못했지. 아주 짧게 쓸쓸한 낯빛이 스쳤다.)
…할 만큼 했으니까. 너도 떠날 거니.
유리:기일에 불러. 빚 갚아야 하니까.
(저녁 한 끼랑, 빌린 옷 정도면 얼마로 갚아야 하나. 헤아려보다가 그만두었다. 평생을 갚기엔 억울하니 이번에도 할 만큼만 하련다.)
언젠가 네 미련이 나타나면, 그 때는 붙잡는 것 정도는 도와주지. 너야 상대가 잡아줄 때까지 어찌할 바 모르고 기다릴 게 뻔하니까.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다. 역시 쓸모없는 것을 기억에 넣었다. 쓸쓸한 낯을 마주보고 있자니 자그마한 사라트와 얼마나 변했는지, 그런 것들이 절로 눈 앞에 떠오르니.) 네가 내 이유가 되지 않더라도,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고 충분히 지쳤어도, 다행스럽게도 더는 세상에 갚을 것이 없어서...
이제는 꿈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쉴 수 있어. 재미있지 않나.
사라트:내 앞에서 재미를 찾아도. (어떤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다행이군.
유리. (붙잡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묻지 않을 질문을 속으로만 생각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잡겠다고 손 뻗어도 제대로 잡힌 것이 하나도 없었어서.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이제는 미련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누구의 기일을 말하는 거니.
유리:푹 쉬어지더라고. 이번 기회에. (방긋 웃었다.) 어차피 남을 거라면, 부유하지 말고 발 붙이고 살아. 그 어린 날에도 이유가 남지 않은 채로 버티겠다 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네가 챙길 기일이 아트미스 페르테나 말고 있나. 빚 갚겠다 했는데 끝까지 거절했거든.
사라트:오빠를 만났어?
유리:응.
사라트:….
만났다면 알겠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 미련은 그 과거에 있어.
보고 싶었는데.
유리:알아.
(왜 친절한 낯의 아트미스 페르테나가 그리도 껄끄러웠는지, 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알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사는 내내 평생을 그리워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리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됐다는 기분이 든다. 같은 미련을 가진 사람이 그 기분을 모를 리가 없다. 세상에서 사라져서라도 영영 지워버리려 했던 미련이 고개를 치켜든다.) 그래서,
네게 물어봤어. 이유가 남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사라트:이유가 남지 않으면.
내 대답보다는 안제의 답을 알고 싶지만, (그는 그런 물음에 답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 …. 그래서.
유리:바로 떠날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머무를 거라고,
답하던데. 사라트 페르테나가.
과거에 머무르든, 미련에 머무르든, 놓아버리려고 용쓰지 않아도 돼. 당장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열세 살 너를 잊고 살아가니까 그리 붙잡지 못하고 떠오르고 흘러가는 거다, 멍청아.
사라트:열세 살 나를 기억하고 살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어. (미소가 사그라든다.) 4월이야. 주소는 적어줄 테니 생각나면 들르렴. 부르겠다는 답은 못 하겠어. 네가 사라진 사이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이유가 생겼거든.
그러니 그런 것 말고. (연구를 거듭하고 남기지 않아도 될 메시지를 남겨가며 무언가가 세운 계획이 망가지도록 했다. 유리에게 찾아갔던 그것이 나를 온전히 남겨둘까. 그럴 리가. 더 확실하게 보복하려 들겠지. 다음 차례는, ……) 떠오르고 흘러가지 않을 수 있는,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면 내게도 알려줘. (돌아온 식물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워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던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 아꼈던 것이 돌아왔지만 그 시절 아끼던 마음까지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언젠가 내게 다른 미련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져도 … 쉬는 걸 다시 방해하지는 않을 생각이라. 이번에는 부르지 않을 거야. 능력껏 알아채 봐. 네가 내킨다면.
유리:소식이 들려오길 빌지. 너도 그래야 할 거야. 내 성격 급한 거 모르실 리 없으실 테고 오밤중에 잘 붙어 있던 문짝 날아가며 옛 친우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을 테니.
하는 김에 겸사겸사, 내 휴가가 아주 평온하길 빌어줘. (지루해 죽을만큼,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다시 맘먹을 만큼 따분한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돌아온 식물들을 살피면서 이게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끼고 살았나 고민도 해 보고, 더이상 먹어줄 사람이 없는 식사를 공들여 만들어 보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결심대로 은혜도 갚고, 원수도 갚고. 사람이 은혜 갚는 학도 아니고 좋은 일만 갚으면 쓰나. 성가시게 하던 놈들 싹 찾아내야지. 찾아서 조져야지. 멋진 휴가 계획이다.)
그동안 아무리 의욕이 없어도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않고 살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아. 응.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가까운 시일 내로는 못 간다.
사라트:왜 다 조지겠다는(보라 머리 누군가에게 배운 험한 표현이다.) 말로 들리지.
유리:흠. (어떻게 알았지.) 그럴 예정이니까?
사라트:(문짝 한 번 본다.)
….
문은 부수는 게 아니고 여는 거다.
(이런 말이라도 안 해두면 어느 날 갑자기 부수고 들어올 것 같아서.)
잘 지내렴. 내 소식은 … 내키면 알리도록 하지.
유리:알아. 하지만 안에서 안 열어줄 때는 부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과거에는 건네지 않은 인사를 마무리한다.) 잘 지내, 사라트 호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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